▶ 격동의 근대와 세계대전
1848년, 밀라노 시민들의 반오스트리아 투쟁인 이른 바 “5일(Cinque Giornate) 혁명”으로 라데츠키(Radetzky) 총사령관은 밀라노에서 일시 퇴각하였다. 밀라노는 오스트리아에 대항하기 위해 사르데냐 왕국의 도움을 청하면서 사르데냐 왕국이 승리할 경우 합병까지 약속을 하였다. 하지만, 쿠스토차(Custoza) 전투에서 오스트리아 군대는 사르데냐 군을 격퇴하였고, 전투공적을 인정받은 라데츠키는 롬바르디아와 베네치아의 총독에임명되었다.
밀라노는 1859년 제2차 독립전쟁을 통해 오스트리아의 지배에서 벗어나 사르데냐 왕국에 편입되었고, 1861년 이탈리아 통일을 맞이한다. 밀라노는 수도는 아니었으나 당시부터 이탈리아에서 가장 현대적이고 산업적으로 발달한 도시였다.
산업이 발달하자, 물자 수송을 위한 철로 역시 자연스럽게 증설되어(※오스트리아 식민지 시절부터 건설이 시작) 북부 이탈리아의 철도 허브도시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1883년에는 밀라노에 유럽에서는 최초이며 전세계적으로는 뉴욕에 이은 두번째로 발전소가 건립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인플레이션으로 인한 기근에 허덕이던 민중은 1898
년에 민중운동을 일으키게 되는데, 4일간 지속된 이 운동을 진압하기 위해 이탈리아 왕은 대포 등 전시에 사용하는 무기를 동원했고 결국 1,000여명의 사상자가 발생하게 된다. 반정부 성향의 기자 역시 대거 구속 조치되었고, 탄압을 피해 많은 지식인들이 해외로 도피할 수 밖에 없었다. 진압을 주도한 바바-벡카리스(Bava-Beccaris) 장군은 민중에게는 ‘밀라노의 도살자’로 알려졌으나 움베르토 1세 당시 이탈리아 왕은 이 장군을
상원의원으로 임명한다. 폭정으로 민중의 반발을 산 움베르토 1세는 결국 무정부주의자 브레쉬(Bresci)에 의해 밀라노 근교 몬차에서 암살당했다. 이처럼 밀라노는 이탈리아 산업의 근간인 동시에 정치적으로도 진보적이고 혁명적인 사상을 가지고 있어, “오늘 밀라노가 생각하는 일을 이탈리아는 내일에야 생각하게 될 것”이라는 표현이 탄생하게 되었다. 산업 도시였기에 밀라노의 구성원은 대부분이 노동자였고, 불평등과 폭정에 항거하는 민중 운동은 20세기에 이탈리아에서 사회주의가 득세하게 되는 기반이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의 폭격으로 돔이 파괴된 비또리오 에마누엘레 2세 갈레리아
1919년 파시스트 정당을 이끄는 무솔리니(Benito Mussolini)는 밀라노에서 검은셔츠단(camicie nere)이라는 파시스트 전위대를 조직한다. 2차 세계대전을 치르는 동안 이탈리아의산업생산기지이자 금융 중심지인 밀라노는 무차별적인 폭격을 당했다. 전쟁 중에 밀라노를 상징하는 건축물들도 다수가 파괴되었다. 스칼라 극장, 빗또리오 에마누엘레 2세 갈레리아, 스포르체스코 성,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이 보존된 산타 마리아델레 그라치에 교회 및 밀라노 왕궁 등이 폭격으로 피해를 입었다. 전차나 철도 역시 사용이 불가능할 정도의 폭격으로 인해 50만 명이 피난길에 올랐다.
1943년 이탈리아가 항복을 선언한 이후 북부 이탈리아는 1945년까지 독일의 지배를 받게 된다. 이에 이탈리아어로 파르티쟈노(Partigiano)라고 하는 반파시스트 레지스탕스가 조직되는데, 1945년 4월 25일 레지스탕스가 대대적으로 봉기해 무솔리니를 체포하여 총살하게 된다. 이탈리아에서는 레지스탕스 봉기일인 4월 25일을 해방기념일로 지정하고 있으며, 총살된 무솔리니와 파시스트들의 시신을 매달아 두었던 밀라노의 로레토 광장
(Piazzale Loreto)에서는 매년 이를 기념하는 퍼레이드가 진행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