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오나르도 다빈치
화가, 조각가, 엔지니어, 과학자 등 수많은 타이틀을 보유한 르네상스 시대의 천재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밀라노 출신은 아니나 밀라노에서 수년 간 거주하며 많은 작품을 남겼다. 밀라노시내 산타마리아 델레 그라치에 성당의 벽에 남긴 ‘최후의 만찬’을 비롯해 시내 도서관 등지에 많은 작품들이 보존되어 전해지고있으며, 그의 이름을 딴 과학 박물관도 설립되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자화상 - 1513년作(추정)
다빈치의 밀라노 체류는 크게 두시기로 나뉜다. 서른이 되던 1482년부터 1500년까지, 그리고 말년즈음인 1508년부터 1513년까지 두번에 걸쳐 밀라노에 체류한 것으로기록된다. 1482년 서른의 다빈치는 당시거주하고 있는 피렌체를 지배했던메디치 가문의 사절로 밀라노공국을 방문하게 된다. 스포르차(Sforza) 가문의 지배하에 있던 밀라노 공국은 당시 유럽에 몇 안 되는 인구 십만의 대도시였다. 단순한 예술가가 아니었던 다빈치는 피렌체 메디치 가문의영향력 하의 신플라톤 주의적 문화에 이미 염증을 느끼기시작했고, 밀라노에서 새로운 문명과 과학 기술을 접하고는밀라노에 머물기로 결심하게 되는데 이 시기를 밀라노 시대 제1기라 칭한다. 다빈치는 밀라노에서 활동하며 다양한 작품을 남기게 되는데,그 중 가장 유명한 작품은 산타마리아 델레 그라치에 교회내부에 그린 벽화 「최후의 만찬」(1495~1498) 이라 할 수 있다.현재에는 런던의 내셔널 갤러리와 파리 루브르 박물관에 전시된2점의 「암굴의 성모」역시 밀라노에서 완성한 작품으로, 미묘한음영과 그라데이션을 표현하는 다빈치 특유의 화법인 “스푸마토(sfumato)”가 처음 등장한 미술사적 가치가 높은 작품이기도하다. 이 화법을 바탕으로 한 다빈치의 또 다른 유명작은 대표작인「모나리자」(1500~1503, 파리 루브르 박물관)가 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
이후 다빈치는 밀라노를 떠나 파도바, 베네치아 등에서 활동하다가 피렌체로 이동하게 된다. 당시 밀라노를 통치하던샤를 담부아즈(Charles d’Amboise)는 다빈치에게 루이 12세를위해 작업할 것을 요청하여1 다빈치는 1508년에 다시 밀라노로돌아오게 된다. 다빈치는 이 때부터 1514년까지 밀라노에거주하게 되는데 이 때를 ‘다빈치의 밀라노 시기 제2기’라 부른다.이 당시 다빈치는 밀라노 시내 중심가의 산 바빌라 성당 인근에거주하면서 프랑스 왕정의 후원으로 생활비를 충당하였다.
이당시에 다빈치는 파비아 대학에서 해부학을 연구하는 등 걸작을남기기보다는 연구 활동에 매진하였다. 실제로 밀라노시내의여러 도서관에는 다빈치가 연구하면서 남긴 노트의 원본들이 남아있다. 이런 연구 활동의 바탕으로 설계된 것이 밀라노 시의 나빌리(Navigli) 운하이다. 이 운하는 훨씬 이전부터 이미 도시 방어,용수 공급, 물자 운반 등에 쓰이는 시의 중요한 자산이었으나,다빈치가 운하의 관개 공사와 확장공사에 참여하면서 운하를통한 물자의 시내 이동을 자유롭게 만들었다. 이후 나빌리는점차 복개되어 현재 남아있는 운하는 당시의 것보다 매우 축소된모습이다. 1953년 개관한 레오나르도 다빈치 과학기술 박물관(Museo della Scienza e della Tecnologia “Leonardo da Vinci”)은다빈치의 노트에 기록된 설계를 바탕으로 실제 제작한 모형들을다수 전시하고 있는 독특한 전시관으로 유명하다. 한편 2003년댄 브라운의 소설 다빈치 코드가 출판되면서「최후의 만찬」을비롯해 밀라노시가 보유하고 있는 다빈치의 노트 및 작품들이국제적으로 재조명 되는 기회가 되었다.
+본 기사는 주 밀라노 대한민국 총영사관에서 제공한 자료로 총 9편에 걸쳐 밀라노의 역사, 문화, 생활정보등을 간단하고 알기 쉽게 정리한 자료입니다.